3장 나: “이러다가 지옥 가는 건 아닐까 모르겠네.”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열기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디며, 나는 반쯤 농담조로 중얼거렸다. 소녀: “그럼 전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겠네요.” 나: “뭐야, 그 반응은.” 소녀: “저도 공범이니까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소녀의 미묘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소녀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덧붙여진 이야기는 농담과 진담이 정확히 반씩 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그나저나, 몰랐어. 저 가게 주인의 손녀가 그 화재 사고의 피해자였을 줄은.” 소녀: “그러게요. 하마터면 난처한 상황에 처할 뻔했어요.” 나: “그것도 그렇지만, 되게 쓸쓸해 보였지. 그 주인 할머니.” 소녀: “…… 좋은 곳에서 만났으면 좋겠네요.” 좋은 곳이라. 그랬으면 좋겠네, 라고 생각하며, 나는 진심으로 그 두 사람을 향해 행운을 빌어 주었다. 몇 걸음 정도 말없이 발걸음을 내디뎠을까. 소녀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소녀: “제 가족도 그 할머니처럼 저를 여전히 생각하고 있을까요.” 나: “아마도. 아니, 분명 그렇지 않을까.” 소녀: “…… 그렇겠죠.”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이는 소녀의 표정에서는 진한 쌉싸름함이 묻어났다. 소녀: “하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네요.” 나: “아, 으응…….” 소녀: “왠지 쌀쌀한 기분이에요.” 한여름의 쌀쌀한 기분이란 어떤 것일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녀: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요?” 소녀는 다시 걸음을 한 발짝 내디디고서는, 아주 약간 높아진 톤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어쩌다 보니 제법 무거워져 버린 분위기를 풀고자 하는 소녀 나름대로의 노력이었으리라. 나: “마지막으로 근처에 있는 주택가 쪽으로 가 보려고. 그쪽에서도 1년 전에 화재가 일어났거든.” 소녀: “여기서 그리 먼 곳은 아닌가 보네요.” 나: “으응, 걸어서 30분 정도면 도착할 거야.” 아마도 오늘의 마지막 경유지가 될 장소로 향하는 길. 그곳에서 일어날 일이 긍정적인 쪽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 말고, 묘한 딜레마에 빠진다. 소녀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왠지 쌀쌀한 기분이었다. 주택가에 도착하자, 늘어져 있는 3층 정도 높이의 맨션과 허름해 보이는 주택들이 눈에 들어왔다. 듬성듬성 오가는 사람들이 간혹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중얼대는 나를 힐긋 바라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지도에 나타난 대로 세 번째 모퉁이에 접어들자, 좁다란 골목이 나타났다. 더 이상의 자세한 정보가 지도에 나타나 있지는 않았지만, 화재가 일어났던 장소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어 블록 정도를 더 걸어가서, 나와 소녀는 화재가 일어났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 “사람이 사는 것 같아 보이진 않지?” 여전히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는 벽면을 힐긋 바라보며,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 “그러게요.” 화재의 흔적은 생각했던 것보다 길게 이어져, 서너 가구의 벽면을 검게 칠해 놓고 있었다. 화재가 일어난 곳이 한 군데였던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 “불이 제법 크게 번졌나 봐.” 불길의 흔적이 이어진 곳을 찬찬히 바라보며, 익숙한 장소를 찾아온 것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실제로는 단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낯선 곳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정겨운 구석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 정겨운 것처럼 느껴지는 감각을, 나는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여기까지 번졌었나 보네.” 나와 소녀의 발걸음이 짙은 회색의 상처가 끊어진 지점에서 멈춰 섰다. 건너편 집에서는 주말 오후를 함께 보내는 가족 간의 행복한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불에 타 껍데기만 남은 이쪽의 풍경과는 상반된 것처럼 느껴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나는 다시금 시선을 무채색의 공간 속으로 옮겼다. 나: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내가 들어가면 좀 수상해 보이겠지?” 소녀: “저 혼자서도 괜찮아요.” 나: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나는 소녀가 반쯤 폐가처럼 변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벽에 몸을 기대었다. 무채색의 세계를 등진 나의 눈앞에는 온갖 색으로 덧칠된 세계가 펼쳐진다. 아직 해가 지기엔 조금 이른 시간의 하늘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는 맞은편의 가정집에서는 살갑기 그지없는 장밋빛 색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내가 그리워하던 감각이란 이런 것이었을까. 가족. 가족이라는 단어가 나의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하자, 오래된 고민들이 하나둘씩 기다렸다는 듯 나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 ‘엄마랑 아빠는 어떻게 됐으려나…….’ 잘 지내고 있을까? 아니, 어쩌면 ‘잘 지냈을까?’라고 묻는 것이 옳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불현듯 가게에서 보았던 노파의 얼굴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나: ‘…… 잘 지낼 리가 없지.’ 마치 꿈속에 들어있기라도 한듯, 나는 손을 펼쳐 손바닥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의 몸이 아니지만, 나는 나다. 나라고 자각할 수 있는, 틀림없는 ‘나’이다. 그렇다면 원래의 나는 어떻게 된 걸까? 정말로 빈 껍데기만 남게 된 걸까? 나는, 죽은 건가? 하지만 나라고 자각하는 존재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데? 나: “하아…….” 플라나리아처럼 내 영혼이 두 쪽이 나 갈라진 게 아니라면, 껍데기만 남은 내 몸체는 분명 죽은 것이나 다름없겠지.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걱정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걱정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 씁쓸한 상황이기도 했다. 나는 벽에 기대어 선 채, 오랜만에 가족과 있었던 일들을 어렴풋이 회상했다. 군데군데 기억이 흐릿해진 곳이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가족에 관한 기억은 다른 기억들에 비해 비교적 또렷이 남아있었다. 나: “…….” 미묘했다. 기억 속에서 앵무새처럼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던 무언의 아우성이 흐릿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그 외침이 들려온 곳은 미묘하기 짝이 없게도, 흐릿해진 기억의 틈 사이에서였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내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바로 나의 등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목소리가 선을 그렸다. 여태껏 희미한 점선으로밖에 그려지지 않던 목소리의 흐름이, 웬일인지 오늘따라 또렷한 직선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와 나를 이어주려는 것처럼……. 기억 속의 나는 불길 속에서 왼손을 뻗어, 누군가의 손을 붙잡았다. 불길에 그을린 듯한 오래된 기억이, 어렴풋이 나를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나: “괜찮아?! 정신이 들어?!” 희미해지는 나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점점 커지는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에 뒤섞인다. 그런 일이 있었지. 그을린 벽을 바라보며, 나는 난데없이 떠오른 기억 하나를 멍하니 곱씹었다. 소녀: “뭘 그리 보고 있나요?” 나를 부르는 또렷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분명히 그 자리에 존재해 나를 빤히 바라보는 소녀가 있었다. 나: “아, 아무것도 아냐. 그냥 옛날 생각하고 있었어.” 소녀: “그랬군요.” 나는 벽에 기대어 있던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나: “어때? 기억나는 건 있었어?” 소녀: “아뇨, 저기가 아니었나 봐요. 아무리 둘러봐도 죽음의 색은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 이야기와 함께 표정을 감추고 싶기라도 한 듯 뒤를 홱 돌아보는 소녀. 죽음의 색이라. 주변을 아무리 훑어보아도 나는 발견할 수 없는 색이겠지만, 소녀의 말대로 그녀가 방금 둘러보고 나온 집에서는 아무런 색채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처럼 이어진 목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소녀가 느꼈던 그 색채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였겠지. 소녀가 바라본 그 색채가 궁금하긴 했지만, 애써 알고 싶지는 않았다. 소녀: “그럼, 저쪽으로 한 번 갔다 와볼게요.” 불길의 흔적이 이어진 옆집으로 몇 걸음 정도 더 걸어가, 이번에도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집 안으로 들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무채색의 세계 속으로 사라지는 소녀의 뒷모습에서는, 묘하게 쌀쌀한 기운이 감돌았다. 반쯤 열려 있는 대문과 작동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초인종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초인종 옆에는 잔뜩 그을려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명패가 걸려 있었다. 혹시나 새까맣게 묻어있는 그을음을 손으로 지워내 보면 이름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명패로 손을 뻗으려는데,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나: “…….” 나를 이상하다는 듯 빤히 쳐다보는 한 여학생. 교복 차림은 아니었지만, 아마 중학생 정도가 아니었을까 추측되는 키와 외모였다. 이번에도 내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 중 한 명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고는, 명패에 가져대려던 손을 내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괜히 수상하게 보일 만한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을 테니까. 익명: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아주 잠깐, 정적이 흐른다. 나: “응? 아무것도…….” 익명: “거짓말.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고요. 계속 혼잣말만 중얼거리고, 여기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서 온 거예요?” 그 여자아이의 눈에 나는 이미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있었던 모양이었다. 해가 지지 않은 주택가의 골목길은 여전히 더웠다. 다시 말해, 나의 사고 회로를 날카롭게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 “아…… 그게. 실은, 예전에 여기 살던 여자애랑 같은 반 친구였거든.” 무의식적으로 여자아이의 시선을 마주 보는 것을 피하고선, 나는 그렇게 말했다. 결국 내가 택한 것은 아까 가게에서 급히 생각해냈던 거짓말을 재활용하는 쪽이었다. 익명: “아하, 저쪽 집에 살던 언니 말하는 거죠?” 의외로 그 여자아이의 얼굴에 서려 있던 ‘당신, 수상해요’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은 금세 반쯤 사그라들었다. 다만, 그녀가 가리킨 곳은 내가 서 있던 집 앞이 아닌, 한 칸 떨어진 곳에 위치한 2층짜리 주택이었다. 나: “으, 으응. 맞아.” 익명: “그런데 왜 그쪽 주변을 서성이고 있던 거예요?” 나: “여기 들르는 건 오랜만이라서. 예전에 먼 학교로 전학을 간 바람에, 옛날 생각이 나서 둘러보고 있었어.” 익명: “하긴…… 생각해보니까 여기에 수상한 사람이 올 리는 없겠네요.” 여자아이는 나에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거둔 것처럼 보였다. 익명: “어디서 왔어요?” 나: “A구역에서 왔어.” 익명: “그렇게나 멀리요?” 나: “뭐…… 어쩌다 보니.” A구역에서 왔다는 나의 말에, 나를 보는 소녀의 감상이 수상하다는 쪽에서 신기하다는 쪽으로 바뀐 듯했다. 휘둥그레진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 “그 여자애랑은 서로 아는 사이였어?” 익명: “조금은요. 그냥 알고 지내던 언니였어요. 그쪽은요?” 나: “나도 조금. 알고만 지내던 클래스메이트였어.” 익명: “흐음…… 그래요?” 어딘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간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소녀의 눈빛에, 나는 살짝 시선을 틀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옆을 힐긋 바라보았지만, 이 여자아이는 갈 생각도 없는지 여전히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나: “…… 그래서 말인데,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까?” 익명: “보다시피요. 큰불이 났었거든요.” 나: “역시 그랬구나.” 최대한 어색하지 않은 연기톤으로, 나는 혼잣말을 하듯 여자아이의 말에 대답했다. 나: “그 여자애는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어?” 익명: “…… 미나 언니요?” 나: “으응, 이제 여긴 안 사는 거 같아서.” 익명: “그 언니, 다른 곳으로 이사 갔어요.” 나: “… 그렇구나.” 잠깐의 텀을 두고,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나: “그럼, 어디로 이사 갔는지도 혹시 알고 있어?” 익명: “알고 있지만, 비밀이에요.” 소녀는 거기까지 이야기하고선, 뒤로 한 발짝 발걸음을 물렸다. 익명: “전 바빠서 이만 가볼래요.” 길 건너편으로 총총걸음을 하며 사라지는 여자아이에게, 나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곤 벽에 기대어, 저만치에서 모습을 감춘 소녀가 내게 마지막으로 건넸던 거짓말들을 곱씹어 보았다. 여자아이와 내가 주고받은 몇 마디의 거짓말. 하지만 그 거짓말들의 색은 완벽히 상반되어 있었다. 나의 새까만 거짓말과는 달리, 방금 그 소녀는 분명 나와 미나라는 여학생이 각별한 사이였다고 착각한 나머지 새하얀 거짓말을 내뱉은 거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굳이 A구역이라는 먼 곳에서 와서는 이런 주택가를 기웃거리고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나: ‘…… 다른 핑곗거리를 지어내야 하려나.’ 아무래도 나를 죽은 사람과 알고 지냈던 사람이라고 얼버무리는 건, 나쁜 임시방편이었던 것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거짓말을 했던 건, 나 혼자뿐이었던 건 아닐까. 나는 잠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그 미나라는 여학생이 좋은 곳으로 이사 갔길 바라 주었다. 짤막한 묵념이 끝나고, 마땅히 할 생각이 없어진 나는 유령 소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은 어느새 20여 분을 훌쩍 넘겨, 혹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하는 참이었다. 그 여자애의 말대로라면 유령 소녀가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기억은 딱히 없을 텐데. 누가 봐도 수상쩍은 거동으로 근처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피며 집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반쯤 열려 있던 문틈 사이로, 말 그대로 유령처럼 소녀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보기엔 들어갔을 때와 별다른 점이 없어 보이는 소녀의 모습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소녀의 일면에서는 어렴풋이 공허함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 탓일까? 나는 건너편에 있는 집을 가리키며, 소녀에게 말했다. 나: “지나가던 사람한테 들었는데, 우리가 찾던 여학생 집은 저쪽이래.” 그러고는 그쪽을 향해 걸어가려는 나를, 옆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소녀: “괜찮아요. 더 확인해 볼 거 없어요.” 나: “어라, 정말? 그래도 돼?” 소녀: “네. 기억났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가 왜 그런 기억을 갖고 있었는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내게 소녀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 “전 화재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어요.” 소녀의 말을 문자 그대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야기의 맥락을 이해하기란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소녀는 자신의 죽음이 화재와 관련되었을 거라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된 거냐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의 손에 차가운 감촉이 닿는다. 소녀: “일단은 돌아가요. 가면서 이야기할 테니까요.” 나: “아, 으응…….” 20여 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녀가 무엇을 기억해냈는지는 나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소녀의 바람대로 일단은 역으로 향하기로 했다. 역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소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묵비권을 행사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보였고, 아무래도 소녀에게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정면을 바라보고 걸었다. 목소리도, 발걸음 소리도,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바람에 홀로 낯선 길을 걷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이 소녀의 존재를 이야기해주었지만 말이다. 역에 도착할 때까지도 소녀는 생각에 잠겨있는 듯해 보였다. 소녀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역내 의자에 앉아 전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 “죽음의 색이라는 거, 궁금하진 않아요?” 나: “궁금하긴 한데, 굳이 애써서까지 알고 싶은 건 아냐.” 소녀: “그런가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소녀도 그런 반응을 원했던 건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고개를 슬며시 들어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시선을 자신의 무릎 쪽으로 떨구었다. 이 시간대의 대합실에는 구역을 불문하고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듯했다. 그리고 소녀는 그런 시선을 피하고자 하는 쪽이었다. 소녀: “그나저나, 사람이 많네요.” 나: “저녁 시간대니까.” 이번에도 솔직한 대답이었다. 다만 아까의 대답과 다른 점이라면, ‘그러게’라고 대답해도 충분할 만한 이야기에 굳이 사족을 덧붙였다는 것 정도. 소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녀의 눈동자에 내가 투영된다. 나의 눈동자에도 그녀가 투영됐겠지. 눈동자에 죽음이 투영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그림이다. 소녀: “여기서 저랑 이야기하다간 정말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나: “괜찮아. 전화하는 척하면 돼.” 나는 휴대용 태블릿을 꺼내 들고선 귓가에 갖다 대고는, “자, 됐지?”라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소녀에게 정말 괜찮다는 것을 어필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한다. 소녀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잠깐이지만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평상시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간신히 눈치챌 수 있을 정도의 희미한 웃음기를 얼굴에 띤 채, 소녀는 끊겼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갔다. 소녀: “무서운 색이었어요. 불길 속에서 덮쳐오는 죽음의 색은.” 나: “아, 으응…….” 소녀: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감 안 잡히겠죠?” 나: “그렇긴 하지.” 소녀: “불길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거, 되게 끔찍한 일이었나 봐요.” 나: “…… 그렇겠지.” 소녀는 무릎을 위아래로 두어 번 정도 까닥이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소녀: “30대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와 아주머니였어요. 품에는 아이를 안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아이는 살아서 구조가 된 모양이에요.” 나: “부모님이었나 보네. 그나저나 그 무서운 순간에 아이를 살릴 생각을 하다니, 나였으면…… 으음. 모르겠다.” 소녀: “흔히들 말하는 모성애나 부성애라는 걸까요.” 나: “아마도. 스토르게(storge)라고 하던가.” 언젠가 사랑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족애는 이성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그 이야기를 꺼낸 선생님이 힘주어 말했었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있는 소녀를 바라보자, 그녀도 모성애나 부성애와 같은 단어를 마음속으로 곱씹고 있는 듯해 보였다. 생각보다 이른 타이밍에 열차가 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내가 먼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고, 소녀가 뒤따랐다. 열차 안에는 좌석에 앉기는 무리 같아 보일 정도의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열차가 선로에 멈춰 서고, 나와 소녀는 함께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오는 길에는 좌석이 많이 남았었는데, 돌아가는 길은 입석이었다. 반대로 됐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하며 차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푸르름을 잃지 않은 여름의 하늘이 슬슬 퇴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녀: “어쨌거나,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소녀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내쉬는 숨이 들이쉬는 숨보다 길게 들려서인지, 소녀의 호흡은 한숨처럼 들리기도 했다. 소녀: “그곳에서 죽음의 색을 보고 난 뒤로 기억이 조금씩 되돌아왔어요. 제가 화재 현장에서 죽지 못했다는 것도, 맨 처음 우리가 갔던 건물에서 떠올렸던 죽음의 색이 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죽지 못했다니. 의도된 건지, 의도되지 않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괴상한 단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어떻게 된 일인 건지도 기억나?” 소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쯤이었을 거예요. 꽤 늦은 밤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어쩌면 새벽이었을지도 모르겠고요.” 소녀: “여하튼, 시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집에 불이 났었어요.” 소녀: “눈을 떴을 땐 이미 불이 제법 번져서, 숨을 쉴 때마다 기침만 연거푸 해댔던 것 같아요.” 나: “무서웠겠네.” 소녀: “……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너무 무서워서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았는지도 모르겠고요.” 차분한 목소리로 소녀가 말했다. 나는 소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소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저를 구해줬던 것 같아요.” 나: “다행히 소방관이 일찍 도착한 모양이네.” 소녀: “안타깝게도 다른 가족들은 그렇지 못했지만요.” 소녀가 말한 ‘안타깝게도’라는 단어가 감정을 싣지 못한 채 흩어져 사라진다. 무의식중에도 감정이 실린 나의 ‘다행히’라는 단어와는 상반된 느낌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이야기를 또박또박 건네는 소녀의 모습은,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녀: “화재로 죽은 건, 제가 아닌 제 가족이었어요. 제가 기억해 낸 죽음의 흔적은 제가 아닌 제 가족의 것이었던 거죠.” 나: “그랬구나.” 소녀: “제가 기억하는 건 여기까지예요.”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원래 이렇게나 무감각한 일이었을까. 소녀와의 대화는 낮에 보았던 두 사람과 나누었던 대화와 완벽히 상반된 감정선을 이루고 있었다. 소녀는 차창 너머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소녀: “다시 원점이네요.” 나: “꼭 그런 건 아냐. 확실히 아닌 곳을 네 군데씩이나 확인했잖아.” 애초에 이렇게나 쉽게 일이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단 하루 정도 쉬고 난 뒤에, 다음에 찾아볼 곳을 찾아보자. 서두를 필요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신경 쓰이는 건 오히려 다른 쪽의 문제였다.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내 옆에 멍하니 서 있는 소녀를 힐긋힐긋 바라본다. 누가 이 모습을 유심히 보게 된다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소녀: “화재로 가족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저, 진짜 이상하죠?” 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소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솔직하지 못한 대답이 소녀에게 전해진다. 그렇다고 말투에 솔직하지 못한 티가 묻어있던 것은 아니었다. 소녀: “분명 죽음의 색에는 그 당시의 감정도 묻어있을 텐데 말이죠.” 나: “…….” 소녀: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걸요.”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소녀의 목소리가 티 나게 떨렸다. 두려워하는 걸까? 기억하지 못하는 현실을? 그게 아니라면 그 현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소녀 자신을? 소녀: “이거 완전,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네요.” ‘사라져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소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소녀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자신은 없어, 나는 어색하게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에는 조금씩 붉은색 물감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조용히 차창 너머의 풍경만을 바라보고 있자니, 여태껏 무뎌져 있던 감각이 조금씩 원래대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꼬박 몇 시간을 걸어서 그런가, 가장 먼저 다리 뒤쪽 근육이 욱신거렸다. 그 뒤로는 이것저것 찝찝한 감각들이 밀려 들어왔다. 등어리에 흘러내렸던 땀 자국이라든가, 신발에 들어온 모래 먼지라든가. 얼른 집에 도착해 씻고 이부자리에 눕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집에 도착했을 땐 예상했던 대로 새까만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저녁 8시. 평소 같았다면 그대로 씻고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겠지만, 오늘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옆을 슬쩍 돌아보니, 소녀도 티는 내지 않으려 하고 있었지만 분명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에어컨을 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에선 느낄 수 없었던 인공적인 찬 바람이 침실을 메웠다. 침대에 앉아있는 소녀는 아까보다는 한층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그럼, 난 씻을게.”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나는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욕실을 먼저 소녀에게 양보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소녀로부터는 ‘그럴 필요 없어요’라는 짤막한 대답만이 돌아올 것이 뻔했기에, 빨리 샤워를 끝내는 편이 더 나을 거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물에 하루종일 혹사된 몸을 맡기고 있자니, 이대로 몇 시간이고 따뜻한 물을 뒤집어쓰고 있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방해하긴 했지만.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이른 타이밍에 샤워기를 끄고는 욕실 밖으로 나왔다. 샤워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오자, 소녀는 내가 욕실에 들어가기 전과 다름없는 자세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안 씻어?’라고 묻는 대신, 나는 이부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기로 했다. 내가 잠에 들면 소녀도 나를 조금은 덜 신경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소녀에게 등을 보인 채 잠들려 하는데, 어째서인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피곤함에 못 이겨 금세 꿈나라 행 열차를 탈 줄 알았는데. 하다못해 나는 억지로라도 잠에 들기 위해 양을 세기 시작했다. 양이 한 마리, 양이 두 마리……. 오늘따라 유난히 머릿속을 뛰노는 양들이 활기차 보였다. 소녀: “…… 자요?” 머릿속에서 302번째 양을 세었을 때쯤,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 “정말 자는 거 맞죠?” 적당한 크기의 목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를 간질였다. 곧이어 나의 얼굴 위로 희미한 손길이 느껴졌다. 아마도 소녀가 나의 얼굴 위로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마터면 미간을 움츠릴 뻔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스르륵 소녀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나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희미한 웃음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살짝 굵은 숨소리 같은 소녀의 웃음소리를, 나는 어느새 정확히 집어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소녀: “자는 척하는 거라면, 고마워요.” 그런 이야기가 내 귀에 닿은 뒤, 욕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늦은 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것만 같은 익숙한 음색이었다. 300마리 언저리에서, 나는 양을 세는 것을 그만둘 수 있었다. 여지껏 양을 세고 있던 나는 우습게도 그 소리를 신호로 천천히 잠에 들었다. 꿈을 꿨다. 전에도 여러 번 꾼 적 있는, 익숙한 꿈이었다. 거리를 걸었다. 사람이 없는 거리를, 혼자 걷고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발걸음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느껴지는 고요함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는 생각만이 들 뿐이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유미도, 현지도, 그리고 이름 모를 소녀도……. 나는 이유 모를 쓴웃음을 지었다. 꿈에서 깬 나를 반긴 건 밝아오는 여명이 아닌 한밤중의 어둠이었다. 새벽 세 시. 아직 해가 뜨기엔 한참이 남은 시각이었다. 목이 텁텁했다. 요즘 들어 목이 말라 깨는 경우가 잦아진 것 같은데.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침대를 힐긋 바라보았다. 나: “…….”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는 소녀로부터는 희미한 숨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나: ‘자고 있는 건가?’ 목은 말라붙어 있고, 소녀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있고. 아무래도 에어컨 온도가 너무 낮았던 걸까. 종종 목이 말라 밤중에 깼던 게 에어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내 희망 온도를 살짝 올리고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다시 이부자리로 돌아와 잠을 청하려는데, 침대에서 들려오던 소녀의 숨소리가 미묘하게나마 거칠게 느껴졌다. 나는 그대로 몸을 누이려다 말고,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을 소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보았다. 나: ‘…… 어디 아픈가?’ 소녀의 가녀린 양손이 얇은 여름 이불을 꽉 붙든 채 떨리고 있었다. 기분 탓일 거라 생각했던 거친 숨소리도, 확실히 불안정한 주기로 소녀의 입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걸어 다녀서 몸살에 걸리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유령이 감기나 몸살에 걸린다니,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지금의 상황이 언젠가 겪어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 “아, 맞다.”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소녀가 이곳에 온 첫날 밤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소녀는 지금도 악몽을 꾸고 있는 건가? 이불을 살짝 내려 확인해 본 소녀의 안색은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창백해 보였다. 나는 냉장고에서 한 컵의 물을 더 따라와서는 소녀를 조심스럽게 깨워 보았다. 나: “…… 괜찮아?” 소녀: “아…… 으으…… 우으으…….” 소녀는 나의 조심스러운 부름에도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는 악몽 속을 헤맸다. 왜 진작 괜찮냐는 말을 건네지 못했던 걸까. 죽음의 색을 마주할 때마다 소녀로부터 느껴지던 흐릿한 위화감. 여러 색이 뒤섞이면 새까매지는 것과는 달리, 감정이란 뒤섞이면 뒤섞일수록 빛처럼 새하얘져 버리는 걸까.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항상 고개를 푹 숙인 채 길을 걸어 다니던 소녀가 애써 바라본 죽음의 색은 분명 내가 상상하기 힘든 감각들로 물들어 있었을 것이다. 금세 잠에서 깨어났던 그 날과는 달리, 피곤해서인지 소녀는 깊은 잠에 빠진 듯해 보였다. 소녀를 흔들어 깨워야 하나, 아니면 그냥 이부자리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으려나. 슬슬 몰려드는 새벽녘의 수면욕이 나의 선택을 재촉하고 있었다. 소녀를 깨운다 해도, 다시 잠에 든 소녀가 악몽에 도로 빠져들지 말라는 법은 없을 테고.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뒤로, 내가 어떤 의식의 흐름에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그랬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의 옆에 잠시 앉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을 오래된 팝송 하나를 조용히 흥얼댔다.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거라는 멜로디가 소녀의 귓가에 연주되고, 나의 손은 샴푸 향이 여전히 남아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기억에 남아있는 멜로디가 다 연주 되었을 때쯤, 소녀는 오컬트부실에서 보았던 그 편안한 얼굴을 한 채 새근새근 잠에 들어 있었다. 눈을 떴을 땐 평소같지 않은 빛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뒤에야 오늘은 일요일에다가 방학식을 한 뒤라는 것을 깨닫고는 안도했다. 더 볼 것도 없이,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새벽에 잠시 깨버려서 그런가, 팔자 좋게 늦잠을 자 버린 모양이었다. 확실히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자는 건 익숙하지 않은지, 목을 돌리자 평소엔 느낄 수 없었던 뻐근함이 느껴졌다. 옆을 바라보자 소녀는 지난 새벽에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듯 잠에서 막 깨어난 나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왠지 소녀에게 게으름뱅이 같은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괜히 머쓱했다. 나: “어, 언제 일어났어?” 소녀: “방금요.” 소녀의 말투가 나를 관찰하는 것처럼 느껴진 건 분명 나만의 착각일 것이다. 소녀는 자신을 없는 존재 취급하라고 했지만, 현지의 말이 맞았다. 어떻게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을 없는 존재 취급할 수 있다는 것인가? 게다가 나보다 아무리 많아도 한두 살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는 또래 여학생의 시선을……. 나: “배는 안 고파?” 소녀: “조금요.” 나: “아, 음…… 그럼 아침 준비를…….” 아니, 점심인가. 시계를 보니 이미 정오가 코앞이었다. 부엌으로 향하다 보니 배가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늦게나마 내가 잠에서 깬 것도 배가 고파서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저녁을 좀 일찍 먹기도 했고. 어쩌면 소녀가 ‘조금요’라고 자신의 의견을 조금이나마 내비친 것도 무척이나 배가 고파서 그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냉장고를 열었다가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 맞다. 냉장고에 아무것도 안 남아 있었지. 빈손으로 방으로 돌아오자 소녀의 시선이 그런 나의 뒤를 말없이 따라붙었다. 나: “생각해보니 냉장고에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마트 금방 갔다 올게.” 대충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얼른 마트로 향했다. 현관을 나선 뒤에야 뒤늦게 소녀에게 점심으로는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볼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돌아올 대답은 ‘뭐든지 괜찮아요’ 같은 세상에서 가장 간단하면서도 난해한 문장일 게 뻔했다. 어제보다 한층 더 더워진 건지, 잠깐 걸었을 뿐인데 이마가 땀에 젖었다. 15분 정도를 걸어 항상 식재료를 사러 들리는 집 근처의 작은 마트에 도착했다. 붉은색 카트를 몰고 식료품 코너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말은 작은 쇼핑몰이라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A구역 중심부에 위치한 대형 쇼핑몰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다. 비교하자면 이곳은 있을 건 다 있을 곳이고, 대형 쇼핑몰은 없어도 될 것까지 다 있는 곳이라고나 할까. 나는 익숙한 리듬에 맞추어 식료품 코너를 배회했다. 식료품 코너를 맴돌며 먹을거리들을 쇼핑 카트에 이것저것 담고 난 뒤에서야, 카트에 담긴 것들이라고는 하나같이 냉동식품이나 영양가 없는 즉석식품이라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여태껏 익숙해져 있던 몸의 궤적에 나도 모르게 기대어 있던 것이겠지. 잠깐 시야를 의식적으로 넓혀 유령 소녀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녀는 ‘뭐든지 괜찮아요’라는 말을 항상 반복하겠지만, 그렇게 선택의 폭을 한없이 늘려주는 것이 매번 달갑지만은 않은 법이다. 익숙해져 있던 몸의 궤적을 잠시 비틀어볼까 하고 다른 쪽으로 카트를 돌리려는 순간. 나는 다른 쪽 쇼핑 코너에서 걸어오던 누군가와 우연히 눈이 마주친다. 유미: “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만나 그런지, 유미는 내게 평소보다 더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유미: “언제 다시 만나나 했는데, 생각보다 금방 다시 보게 됐네?” 나 역시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게.”라며 유미에게 인사를 건넨 나는 그녀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쇼핑 바구니를 힐긋 살폈다. 쇼핑 바구니에는 샐러드용 채소, 칼로리밸런스, 탄산수, 그리고 무지방 우유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나는 교복 차림의 유미에게 말을 건넸다. 나: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유미: “응, 오늘 첫 멘토링 날이었거든. 아침에 애들 만나고 오는 길이었어.” 깜빡 잊고 있었다. 방금 막 일어난 터라 나의 시간 감각을 기준으로 말을 꺼냈었는데, 유미와 나는 하루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우물쭈물하는 티를 보이던 나의 얼굴을 유미가 살핀다. 유미: “피곤해 보이네?” 나의 안색을 확인한 유미는 금세 내 상태를 진단했다. 나: “어, 그래 보여?” 유미: “혹시 방금 막 일어나서 마트 온 건 아니지?” 너무 정확한 진단이라 뜨끔 하는 소리가 절로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 혼자뿐이라면 어제의 일 때문에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변명하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었겠지만, 유미에게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게 뻔했다. 나의 침묵이 대답을 대신하는 동안, 유미는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딴청을 피우며 계산대 쪽으로 카트를 밀었다. 유미가 뒤따라왔다. 아무래도 유미 역시 마찬가지로 장을 다 본 모양이었다. 그동안 유미의 잔소리가 계산대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마트에서 집으로 향하는 방향도 같은 쪽이었기에, 집으로 가는 길도 유미와 함께였다. 다행히 마트에서 빠져나온 뒤로 더 이상의 잔소리는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유미와 사거리에서 나란히 서서는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멘토링은 어땠어?” 유미: “히, 나 가르치는 데 소질 있나 봐. 그냥 선생님이나 할까?” 나: “며칠 전엔 장래희망으로 연구원이라고 써내지 않았어?” 유미: “그러게. 아무래도 부모님은 그런 쪽으로 전공을 정하길 바라는 것 같아서. 요즘 교사한다고 하면 다들 뜯어말리잖아.” 나: “하긴, 그렇긴 하지.” 횡단보도로 발을 내디디는 유미로부터 들려오는 심장박동을 느낀다. 항상 꿈을 이야기할 때면 묻어나오는 기분 좋은 두근거림은 마치 내게 딱 맞는 주파수처럼 들렸다. 오늘따라 조금, 잡음이 섞인 것 같긴 했지만. 나: “부모님 권유였구나.” 유미: “그렇지만 가르치는 게 재밌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가볍게 한숨을 내쉰 유미가, 나를 바라보았다. 유미: “너라면 어땠을 것 같아?” 나: “그런 질문 해도, 나는 네가 아니잖아…….” 유미: “에헤헷, 그런가.” 나: “뻔한 대답이지만, 네가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네.” 유미: “흐음, 뻔한 대답이라…….” 나: “그리고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에게 있어 엄청 특별한 거니까.” 뻔한 대답이라고는 했지만, 평소와 다르게 제법 진지한 나의 목소리에 놀라기라도 한 걸까.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가볍게 생각에 잠기는 유미. 유미는 마치 내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듯, 새파란 하늘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하고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소녀와 함께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았다. 유미와의 일, 현지와의 일, 그리고 유령 소녀와의 일. 무엇 하나 명료한 해답을 내리기 어려운 고민이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우선순위를 매기는 정도였다. 의자를 당겨 데스크탑 앞에 앉았다. 아직 몸에 남아있던 어제의 피로가 내게 하품을 강요했지만, 나는 애써 이를 억누르며 데스크탑을 켰다. 고개를 돌려 침대 쪽을 힐긋 바라보자, 아까 전부터 크게 바뀌지 않은 자세로 나를 지켜보고 있던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두 명이 함께 있는 방치고는 너무 고요한 분위기가 아까 전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어제의 일 때문인 걸까. 소녀는 아침부터 피곤한 건지, 기운이 없는 건지, 집안일을 할 때를 제외하면 자신의 두 배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침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 “으음…….” 소녀의 기운 없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벽에 있었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소녀에게 뭔가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마땅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우선순위 맨 윗부분에 올려두었던 일을 시작했다. 침묵은 그대로 이어져, 방에는 마우스를 딸깍이는 소리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이따금 들려올 뿐이었다. 막상 두 번째로 찾아갈 장소를 정하자니 생각할 것들이 꽤나 많았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많았다고 해야겠지. 그런 것들 중 소녀의 힘없어 보이는 모습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기에, 장소를 정하기 이전에 찾아볼 장소의 범위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힌트가 조금 더 필요했다. 의자를 살짝 뒤로 밀고선, 기지개를 켜며 등 뒤의 소녀를 향해 시선을 슬쩍 옮겼다. 이름도, 나이도, 자신이 누구였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소녀가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란 단 하나뿐이었다. 나: ‘분명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꿈에서 본 것이 아니라면, 분명 언젠가,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던 교복이었다. 다만 문제라면 그 언젠가가 언제인지도, 어디선가가 어디에서인지도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소녀의 출신 중학교를 알게 된다면 의외로 쉽게 문제 해결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소녀가 입고 있는 교복이 어느 중학교의 것인지를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엠블럼도, 이름표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평범한 디자인의 교복. 오랫동안 주변 중학교의 웹 페이지를 찾아보았지만, 소녀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디자인의 교복은 보이지 않았다. 교복 디자인이 웹 페이지에 나와 있지 않은 곳도 있었고, 최근에 교복 디자인이 바뀌어 사진과 다른 곳도 더러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근처 중학교의 교복 디자인을 모아둔 자료가 있을 리도 없고. 결국 그래왔던 것처럼 사망 사고가 일어난 곳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수밖엔 없나. 한참 제자리걸음을 한 것 같다며 얼빠진 얼굴로 다시 기지개를 켜려다 말고,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다시금 소녀를 바라보았다. 나: “저기, 있잖아.” 나의 부름에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나: “혹시 사진 찍어본 적 있어?” 소녀: “…… 사진 말인가요?” 나의 질문을 들은 소녀는 ‘으음’하는 소리를 내며 고민을 하더니, 이내 평범한 대답을 내놓았다. 소녀: “글쎄요. 찍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진 않지만…… 기억이 안 나네요.” 나: “아니, 살아있을 때 말고. 유령이 되고 난 뒤에 말이야.” 소녀: “네……?” 당혹스러움이 섞인 시선이 나를 향한다. 소녀는 내 질문이 가진 의도를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 “왜, 간혹 유령이 사진에 찍히는 경우가 있잖아. 심령사진이라든가. 그런 것처럼 네 모습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더라도 사진에는 찍힐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소녀: “심령사진이라……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갑자기 사진이라니, 제 사진이 필요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나: “맞아.” 아주 잠깐, 여태껏 느꼈던 침묵과는 다른 느낌의 정적이 감돈다. 곡해될 여지가 있는 발언이었던 걸까? 나: “으음…… 네 사진이 필요한 건 아니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네 교복 사진이 필요한 거지.” 소녀는 그제야 내 의도를 파악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 “찾아보려는 거죠?” 나: “응. 인터넷의 힘을 빌리려고.” 충전기 위에 올려져 있던 휴대용 태블릿을 꺼내 들고는 카메라 기능을 켰다. 그러고는 침대 위에 앉아있는 소녀의 모습을 카메라 렌즈를 통해 바라보았다. 화면에 보이는 건 텅 빈 침대의 모습뿐이었다. 태블릿의 화면을 한 번, 그리고 태블릿 너머의 현실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고, 누가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고작 태블릿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비추어진 두 세상이 각기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다. 셔터 버튼을 누르자 찰칵하는 소리가 제법 날카롭게 들려왔다. 소녀를 향하고 있던 카메라 렌즈가 거둬지자마자 소녀는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다가왔다. 소녀: “어떻게 됐나요?” 소녀도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사진이라는 현상을 통해 증명될 것인지가 말이다. 나: “…… 역시 안 찍히네.” 소녀: “그러게요.” 갤러리에 저장된 사진에서 소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저 텅 빈 침대만이 사진 속의 피사체로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소녀는 뭔가 허무한 듯 다시 침대로 돌아가 풀썩 몸을 누였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여섯 시가 다되어 가는 중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지금 침대에 누워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은 소녀가 아닌 나였을 텐데. 유령 소녀 덕분에 나는 지금 책상 앞에서 성실한 척을 하고 있었다. 유미도 그렇고, 소녀도 그렇고, 어쩌면 현지도 그렇고. 내 주변에 나를 타의적으로나마 성실한 사람을 연기하게 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연기라. 생각해보니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을 연기하고 있는 중이었지. 어쩌면 이 말도 안 되는 세상이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해도, 나는 그리 놀라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갤러리에 저장된 사진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한 시간 정도를 더 컴퓨터 앞에 앉은 채 보냈다. 이렇게 오랫동안 한 가지 일에 집중을 한 적이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보낸 듯하다. 학교 웹 페이지와 사망 사고가 일어났던 장소들을 교차해가며 살펴보던 내가 문득 떠올린 것은, 모 학교에서 일어났던 자살 사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는 거였다. 확신은 없었지만, 나의 못 미더운 감이 그쪽을 향하고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나는 바로 소녀를 불렀다. 나: “내일 나가보려고 하는데. 어때?” 소녀: “네. 아무 곳이나 상관없어요.” 나: “아니, 그게 아니라. 몸은 좀 괜찮나 해서 물어본 거야.” 소녀: “몸이요?” 나: “으응. 어제 너무 많이 걸어서 피곤한 건 아닌가 해서.” 소녀: “괜찮아요. 움직일 만은 하니까.”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소녀는 다리를 아래위로 두어 번 까닥대더니, 자리에서 폴짝 일어나 내 뒤로 다가왔다. 소녀: “내일 갈 곳은 어디로 정했나요?” 나: “여기. B구역에 있는 중학교에 가보려고.” 나는 의자를 살짝 옆으로 틀어 소녀에게 모니터 화면을 보여주었다. 소녀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더니, ‘흐음’하고는 짤막한 소리를 내었다. 소녀: “다른 곳은 아직 생각 안 해뒀나요?” 나: “내일은 저기 한 곳만 가볼 거야.” 소녀: “한 군데만요?” 나: “어제 너무 많이 걸었더니 피곤해서…….” 실은 다른 이유에서였지만. 소녀: “좋아요. 그렇게 해요.” 소녀는 언제나 그랬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시각을 확인하고, 살짝 늦은 감이 없잖아 있는 저녁을 소녀와 함께 먹었다. 여전히 2인분 치를 요리하는 건 익숙지 않은지 식탁에 올려진 요리는 지난번보단 나았지만, 여전히 엉성한 건 그대로였다. 방학이 시작한 뒤 첫 번째 주말이 그렇게 지나갔다. 이런 신기한 주말을, 나는 몇 번 정도 더 맞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주말이 끝나고 난 뒤엔, 나는 조금은 달라져 있을까. 어제보다는 조금 이른, 그제와 비교하자면 조금 늦은 시각에 잠에서 깬 우리는 간단히 뱃속을 채우고는 열차를 탔다. 목적지는 어제 이야기했던 대로 B구역에 있는 한 중학교였다. B구역 터미널에 도착해 밖으로 나오자 어제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봤음직한 높이에서 태양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소녀와 함께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보도블럭 위로는 새까만 그림자가 드리운다. 홀로 보도블럭 위를 떠다니는 새까만 그림자는 아무래도 소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소녀: “중학교라고 했죠? 거기선 어쩌다 사람이 죽은 건가요?” 나: “자살이래.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나.” 소녀: “그런가요.” 예상대로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생판 남의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 “자살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소녀가 조금이나마 이야기 속에 자신을 대입시키길 바랐던 걸까. 속으로 주저하긴 했지만, 이미 그런 질문을 건넨 뒤였다. 소녀: “글쎄요. 살아 있었을 적의 제가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그리 멀리 있지는 않은 느낌이에요.” 나: “음…… 그렇구나.” 나의 입과 눈이 서로 상반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미묘하게 떨리는 나의 동공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소녀에게 건넨다. 소녀는 나의 눈동자에 쓰인 메시지를 금방 포착한다. 마치 눈동자에 쓰여진 건 뭐든 읽어낼 수 있다는 듯 말이다. 가벼운 한숨과 함께, 소녀가 말한다. 소녀: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요.” 그런 이야기를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읊조렸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소녀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던 공허함이 오늘따라 더욱 싸늘하게 다가왔으니까. 화창한 날씨를 머금은 학교 운동장의 분위기는 아까의 이야기가 무색할 정도로 밝았다. 운동장에서는 마침 학교 간의 친선 야구 경기가 열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응원하는 학생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교문을 사이에 두고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춰 세운 채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사실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지금 이 시각의 중학교에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중학교는 아직 방학이 시작되지 않았는지,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래서야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어 보였다. 나: “미처 생각 못했네. 아직 중학교는 방학이 아니었을 줄은.” 나는 머쓱한 얼굴로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학생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느낌의 운동장과 그 전경이었다. 소녀: “다들 열심이네요.” 나: “그러게.” 걸음을 멈춘 채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비단 우리뿐만은 아니었는지, 동적인 운동장의 전경과 대비되는 한여름날의 새털구름이 나의 시야를 스쳤다. 옆으로 힐긋 시선을 돌리자, 운동장의 학생들을 빤히 바라보는 소녀가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추억도, 기억도,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흘러가는 지금만이 눈동자에 곧이곧대로 새겨질 뿐. 나: “…….” 무심한 듯 운동장을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에서 떠올린 건, 또다시 그곳에서의 기억이었다.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여름. 여느 때 보다 치열했고, 누구보다 간절했던 그 순간이었으련만, 어째서인지 그 기억은 흐릿하게 남아 막연한 감정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망각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흐릿해져 가는 2년 전의 기억을 움켜잡았다. 마치 수천 년 전의 기억 같은 그 여름의 일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던 내 모습. 그런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주던 한 사람. 하지만 불완전하게 재구성된 흐릿한 추억은 말 그대로 흐릿한 감상만을 남길 뿐이었다. 소녀: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건가요?”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던 소녀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나: “저기서 공 던지는 학생, 멋있어 보이지 않아?” 소녀: “…… 그건 갑자기 왜요?” 나: “그냥, 갑자기 물어보고 싶었어.”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어색한 표정을, 소녀는 지어 보였다. 나: “실은, 옛날 생각이 문득 나서 물어본 거야.” 소녀: “옛날 생각이요?” 나: “야구, 좋아했거든. 잘하기도 했고.” 소녀: “그런가요.” 흥미를 보인다고도, 그렇다고 흥미가 아예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목소리가 대답으로 돌아왔다. 소녀는 다시금 운동장 안쪽을 기웃대며 물었다. 소녀: “역시 지금 같이 들어가 보는 건 무리려나요?” 나: “으응, 그렇겠다.” 소녀: “그럼 저 혼자만이라도 들어갔다 와 볼까요?” 나: “아냐, 나중에 나랑 같이 들어가자. 어차피 여기만 와보려 했으니까 시간도 충분하고. 수업이 끝난 뒤에 슬쩍 들어가면 될 것 같아.” 소녀: “그렇지만 수업이 끝난 뒤에도 경비 아저씨라든가, 여전히 남아있지 않을까요.” 나: “실수로 두고 간 물건이 있어서 돌아왔다고 하면 괜찮지 않을까?” 소녀: “그거야 그렇다 쳐도…….” 소녀의 시선이 아래위로 나를 훑었다. 머뭇대며 바로 말을 꺼내지 못하는 소녀였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나: “나 정도면 중학생으로 보일 만하지 않아?” 소녀: “음…… 의심 받을 거라 생각해요.” 나: “생각보다 단호하네.” 맛없는 요리를 먹으면서도, 불편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항상 선의의 거짓말을 해주었던 소녀라도 이것까지는 무리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아서일까. 소녀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어도 특별한 대미지는 없었다. 나: “괜찮아. 잡아떼면 별문제 없겠지. 여차하면 도망치면 되고, 나쁜 짓 하려는 것도 아니잖아?” 소녀: “알겠어요.” 태블릿을 꺼내 시각을 확인했다. 적어도 네 시는 되어야 하교 시간이려나. 졸지에 세 시간 넘게 계획의 공백이 생겨버렸기에, 나는 즉흥적으로 소녀에게 주변을 돌아다녀 볼까 하는 제안을 건넸다. 소녀: “그렇게 할까요.” 항상 군말 없이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소녀였다. 무작정 길을 걷다 보면 어딘가에 필연적으로 도착하기 마련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 외딴 산속을 헤매던 헨젤과 그레텔이 그랬듯 말이다. 그렇다. 어쨌거나 최후에 발걸음이 닿는 곳은 달콤한 향이 풍겨오는 곳이라는 거다. 나는 목적지 없이 아무렇게나 내딛던 발걸음을, 한 디저트 카페 앞에서 멈춰 세웠다. 나: “여기 잠깐 들러서 시간이나 때우다 가는 건 어때?” 소녀: “디저트 카페인가요.” 소녀는 고개를 들어 ‘체스트넛’이라 쓰여있는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왠지 달콤함이 묻어있는 것 같은 네이밍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소녀는 이내 나를 향해 말했다. 소녀: “어울리지 않는 장소긴 하지만, 사람만 없다면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나를 이야기하는 걸까, 소녀 자신을 이야기하는 걸까. 나는 반투명에 가까운 유리벽을 통해 카페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마치 과자집 안을 몰래 훔쳐보던 헨젤과 그레텔처럼 말이다. 나: “손님은 별로 없는 것 같아.” 애초에 평일 낮의 디저트 카페이니, 하교 시간이 다 될 때까지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카페에 손님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에 맞춰 학교로 향하면 되겠지. 소녀: “그럼, 들어가요.” 문을 열자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고,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드는 복장과 함께 금발의 점원이 나를 맞이한다. 익명: “어서오세요~” 소녀는 그런 환대가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 점원의 눈길을 피했다. 익명: “몇 명이신가요?” 나: “어…… 한 명이요.” 두 명 같은 한 명이란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을 두고 말하는 거였나 싶었다. 익명: “한 명, 맞으신가요?” 일행도 없이 혼자서 디저트 카페에 오는 것은 아무래도 드문 일이었는지, 점원은 마치 내 옆에 서 있던 소녀의 존재를 인정해 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내게 재차 질문을 건넸다. ‘네’라며 고개를 끄덕이고선, 나는 자리를 안내해주려는 점원의 말보다 한발 앞서 인적 드문 구석 자리를 선점했다. 다른 손님이 거의 없는 카페는 꽤나 조용했다. 항상 유미와 함께 왔던 시끌벅적한 디저트 카페와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카페의 미묘한 고요함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소녀와도 묘하게 어우러지는 것 같았으니까. 아무래도 소녀가 말한 디저트 카페와 어울리지 않는 쪽은 나였던 모양이다. 곧바로 점원이 내게 메뉴판을 건넸다. 메뉴판을 받아들고는 소녀에게 눈길을 건네자, 나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소녀가 스르륵 나의 옆에 붙었다. 나는 소녀에게 네가 골라 보라는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소녀: “이거…… 그리고 요거요.” 소녀가 맨 처음으로 고른 것은 몽블랑, 그리고 두 번째로 고른 것은 쇼트케이크였다. 분명 하나만 고르려다 예쁘장한 모양의 쇼트케이크가 건네는 유혹에 결국 넘어가버린 것이리라. 점원에게 소녀가 고른 것에 더해 소프트드링크 두 잔을 주문하고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맞은편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나의 옆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점원이 주문을 받아들고 다른 곳으로 향하자, 나는 그제야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나: “몽블랑 말이야, 먹어 본 기억 있어?” 소녀: “아뇨, 그런 기억은 없지만. 이름이 예뻐서 골라 봤어요.” 하긴,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를 때도, 읽고 싶은 책을 고를 때도 늘 그런 이유에서이기는 하지. 소녀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달콤한 분위기가 인테리어에서도 물씬 느껴지는 것 같은, 아늑한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 “이런 곳에 자주 왔었나요?” 나: “자주까지는 아니지만, 친한 애가 이런 곳에 종종 같이 가자고 해서. 덕분에 몇 번 따라가 본 적은 있어.” 나의 발걸음이 굳이 디저트 카페 앞에서 멈춰 선 것도, 유미가 디저트 카페를 좋아해서라는 이유를 포함하고 있었다. 유미의 취미는 내가 알고 있는 나머지 한 명의 너드 후배와는 달리 여타의 여학생과 비슷하니까, 혹시나 소녀도 이런 걸 내심 좋아하지는 않을까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그리고 지금, 그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은 검증의 시간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있었다. 십여 분 정도가 흐르고, 테이블에는 주문했던 간식들이 놓여진다. 검증의 시간이었다. 나: “먹어보고 나서 무슨 맛인지 나한테도 알려줘.” 접시 위에 놓인 몽블랑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소녀에게 그런 이야기를 건네고 난 뒤에서야, 소녀는 몽블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나는 레몬티를 빨대로 한 모금 마시며, 소녀의 식후감을 기다렸다. 나: “어때?” 소녀: “…… 알고 싶지 않았던 맛이네요.” 나: “으응……?” 몽블랑을 한 입 베어 문 소녀로부터 마치 반어법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만한 감상이 들려왔다. 하지만 소녀의 진지한 어투는 자신의 이야기가 반어법이 아님을 또렷이 알려주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감상을 진심으로 이야기한 것이었다. 소녀답다고 할 수 있는 표현으로 말이다. 소녀: “왠지 모르게 제가 살아있다고 착각하게끔 하는 맛이에요.” 나: “여태껏 내가 만들어 줬던 음식은 죽어있다고 확신하게끔 하는 맛이었겠구만.” 소녀: “아, 아뇨. 그런 의미는 아니었…….”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이는 소녀. 평소에 보기 힘들었던 소녀의 당황하는 모습에, 나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누군가가 그런 내 모습을 보았다면, 나는 분명 혼자서 갑자기 웃어대는 이상한 사람이라 여겼겠지. 소녀도 자신의 반응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던 건지, 나를 따라 쿡쿡대며 웃음을 지었다. 몽블랑의 단내가 덮인 소녀의 웃음소리는 덧없이 느껴질 정도로 달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식이 담겨있던 접시가 바닥을 보였다. 나: “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저기서 골라보는 게 어때?” 소녀: “네……? 아, 아뇨. 그럴 필요까진…….” 나: “왜,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잖아.” 지금 쓰는 게 맞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어쨌거나. 나와 카운터 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머뭇대던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소녀: “그런가요? 그럼 딱 하나만 더…….” 여태껏 가끔씩 볼 수 있었던 소녀의 머뭇거림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표현이었다. 여러가지 감정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수많은 머뭇거림들 중, 행복에 가까운 감정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지금의 표현. 소녀도 내심 그런 감정을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시간이 흘러 카페에 한 명씩 사람이 들어차기 시작하자, 우리는 예정했던 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카페를 나서는 나의 등 뒤로 점원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분명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나의 모습이 중얼중얼 혼잣말을 늘어놓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던 거겠지. 나: “하굣길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네.” 사람을 피해 카페 밖으로 나온 거라고 하기엔, 거리에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인파에 섞여 길을 걸으며, 소녀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잠시, 이곳저곳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장소를 향하던 소녀의 눈길이 어느 한 자리에 머무른다. 잠시 다른 쪽으로 시선이 향하곤 했지만, 네댓 발걸음을 떼는 동안 소녀의 시선은 대부분 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 소녀를 따라 그곳을 바라보았다. 골목길로 접어드는 자리에 위치한 자그마한 게임 센터. 소녀에게 이런 취미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몇 걸음 더 게임 센터 쪽으로 가까워지자, 나는 그제야 소녀가 바라보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소녀의 눈길이 닿은 그곳에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나: “저 인형, 갖고 싶은 거야?” 소녀: “아, 아뇨. 딱히 그런 건…….” 나의 물음에 소녀는 머쓱한 티를 잔뜩 내며 대답을 건넸다. 소녀에게 있어 타인의 눈동자란 운명의 창이듯, 내게 있어 소녀의 눈동자는 감정의 창이다. 소녀도 이를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돌려 나의 눈길을 피했다. 하지만 이내 소녀의 시선은 한 바퀴를 돌아,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소녀가 바라보고 있던 건 각양각색의 인형이 들어있는 인형 뽑기 기계였다. 여러모로 중학생 답지 않은 면모를 보이는 소녀였지만, 어쩌면 그런 부분 하나하나를 모아 평균을 내어 본다면 정확히 중학생 정도로 맞아 떨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우리, 조금만 더 시간을 낭비하는 건 어때?” 소녀: “그래도 괜찮겠어요?” 나: “어차피 어둑어둑해지기 전까지 이런 외부인 티 나는 차림으로 학교에 들어가면 경비 아저씨한테 곧장 의심받을 테고.” 소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나는 소녀를 이끌고 인형 뽑기 기계 앞으로 향했다. 정말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며, 소녀는 순순히 나의 뒤를 따랐다.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한적하다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 인형 뽑기 기계 앞에 선 나는 소녀에게 꽤나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뭘로 뽑아줄까?” 소녀: “…… 저기, 아래쪽에 보이는 곰인형으로 부탁해요.” 소녀가 가리킨 건 인형 뽑기 기계 아래편에 놓여있는 흰색 곰인형이었다. 나: “우왓, 아까워.” 소녀: “…….” 나: “아아아…… 뭐 저기서 떨어져버리냐.” 소녀: “………….” 금방 뽑아낼 수 있을 줄 알았던 곰인형은 번번이 집게손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떨어져버렸다. 처음엔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인형 뽑기 기계로 코인을 넣었던 거였지만, 이젠 자존심 문제에 가까웠다. 나의 옆에 선 소녀는 인형이 집게손에서 떨어질 때마다 안타까운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자 안타까움이 묻어나야 할 반응에서는 안쓰러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지만 말이다. 결국 학교에 도착한 건 어슴푸레한 어둠이 발끝을 감싸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소녀: “인형 하나 뽑는다고 얼마나 쓴 거예요?” 나: “걱정 마. 그리 많이는 안 썼으니까.” 소녀의 손에는 그녀가 원했던 새하얀 곰인형이 쥐어져 있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라는 말이 딱 어울려 보였다. 철없는 동생을 나무라는 듯한 소녀의 말투에 나는 머쓱한 웃음으로 일관하며 교문 근처를 서성였다. 최대한 경비의 감시를 받지 않으며 교내로 들어갈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어디일까. 해답은 의외로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나: “여기, 넘어갈 수 있겠어?” 주차장과 연결된 학교 건물 뒤편의 담자락을 시범 삼아 넘어 보이며,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 “불량학생이네요. 담 넘는 거, 엄청 능숙해 보이는걸요.” 나: “그러는 너도, 능숙해 보이는데?” 소녀: “기분 탓일 뿐이에요.” 그런 이야기를 하며, 소녀는 자신의 눈높이 정도 되는 담장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소녀: “이제 어디로 가면 되나요?” 나: “옥상 쪽으로 갈 거야.” 소녀: “아 맞다.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고 했죠.” 낮의 학교에서 들려오던 시끌벅적함은 어디로 가고, 밤을 맞이하는 학교에 남아있는 건 오직 고요함뿐이었다. 나는 발걸음 소리를 최대한 죽여가며 소녀와 함께 학교 옥상으로 향했다. 어둠이 슬슬 깔리기 시작하는 복도의 분위기는 마치 게임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기도 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주변을 슬쩍 기웃거려 보았지만, 학교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다들 이미 퇴근을 한 뒤인지, 교무실에서도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옥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목 앞에서 끊어졌다. 옥상으로 이어지는 문 앞에 선 나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는 수밖에 없었다. 나: “닫혀있네.” 소녀: “그런 일도 있었으니, 닫혀있을 만도 하지 않을까요?” 나: “하긴, 그렇겠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손잡이에 손을 갖다 대자 묻어있던 먼지 조각이 만져졌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로부터 이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려주는 흔적이었다. 소녀: “그럼 이제 어떡하죠?” ‘어쩔 수 없네요’라고 말하는 듯한 소녀의 눈길이 내게 닿는다. 어쩔 수 없네. 돌아가야겠다. 라고 대답하며 발걸음을 돌리는 것이 일반적인 나의 반응이었겠지만. 나: “교무실에 열쇠함이 있지 않을까?” 소녀: “…… 나쁜 짓은 안 한다지 않았나요?” 나: “으음…… 내가 그랬었나.”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이렇게 평소와는 엇나가고 싶은 날이. 나: “그래서 말인데. 옥상 열쇠, 네가 찾아와 줄 수 있겠어?” 소녀: “알겠어요.” 소녀는 난간 아래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교무실로 향했다. 소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열쇠를 찾는 동안, 나는 쥐 죽은 듯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조용했다. 내뱉는 숨소리, 침 삼키는 소리, 그리고 내 안의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었다. 밤의 학교에서 이런 소리를 듣는 것은. 문 앞에 서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몇 분 정도를 흘려 보냈던 걸까. 들려오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중, 아래층에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난간 아래로 고개를 내밀자 그대로 위쪽을 바라보며 계단을 걸어 올라오던 소녀와 눈이 마주친다. 소녀는 내게 열쇠를 건넸다. 소녀가 건넨 열쇠에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한기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문이 열리며 삐걱대는 소리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변을 살폈지만, 다행히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문틈으로는 밤하늘과 맞닿은 시멘트 재질의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미적지근한 여름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나와 소녀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익숙한 바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 “아무것도 없네요.” 나: “그야, 옥상일 뿐이니까.” 텅 빈 옥상을 바라본 소녀의 감상이 전해진다. 나는 소녀와 함께 난간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차가운 철제 난간대에 팔을 얹으며 익숙하다는 감각을 느꼈다. 시선 아래로 펼쳐지는 적당한 배율의 풍경부터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까지. 익숙하디 익숙한 감각에, 오늘따라 나답지 않은 선택을 연발한 이유도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나는 소녀와 함께 가만히 그 순간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 이곳으로 온 건지도 잠시 잊은 채 말이다. 소녀: “누군가가 당신에게 ‘죽고 싶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땐 어쩔 건가요?” 나의 옆에서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소녀가, 대뜸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엉뚱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대뜸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누구라도 엉뚱한 이야기라 생각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심장에서부터 무언가가 쿵쿵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 “글쎄.” 소녀: “하긴, 이런 이야기 저랑 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겠죠.” 나: “…….” 자조하는 듯한 목소리로, 소녀가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소녀: “이곳에서 떨어진 여학생은 죽기 전까지도 그 이야기를 되새겼나 봐요.” 그랬던 건가. 밤하늘을 보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소녀의 눈동자에는, 달빛 대신 죽음의 색이 새겨졌던 모양이었다.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소녀: “자기가 누군가에게 건넨 '죽고 싶다'라는 말에 대한 대답을요.” 나: “어떤 대답을 들었길래?” 소녀: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여학생이 내린 결론은, 아무래도 '나는 죽어도 괜찮다'였던가 봐요.” 나: “으응…….” 소녀: “잘 모르겠어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나: “그렇구나.” 소녀: “…… 조금만 더 시간을 낭비하다 갈까요?” 의도치 않게 소녀의 팔이 나의 팔꿈치에 닿는다. 심장은 지치지도 않고 무언의 아우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매번, 이렇게 옥상에 앉아있으면 외계인이 내게 교신을 보내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으니까. 그날의 일처럼, 내게서 익숙한 선이 그려졌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언제나 방향을 잃고 뭉개지던 목소리가 이번엔 주파수를 올바르게 잡은 라디오의 음성처럼 차분히 들려왔다. 천천히 선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 선의 도착지점은 다름 아닌, 나의 옆에 앉아있던 소녀였다. 알 수 없었다. 이 이어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낮과 밤이 이어지듯, 소녀와의 이어짐에서 떠올린 기억은 또다시 그때의 일이었다. 한여름 밤의 바람을 맞으며 떠올린 기억은, 또다시 그때의 추억이었다. 지금은 막연해져 버린 꿈이라는 것이 또렷했을 그 무렵의 이야기. 익명: “들었어? 우리 학교 야구부가 처음으로 전국대회에 진출했다는 거?” 익명: “어제 최종 예선전 구경했는데, 선발로 나온 3학년 선배 말이야. 완전 멋져보인 거 있지?!” 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과거의 나는,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겠다는 일념만으로 마운드에서 공을 던진 모양이었다. 그해 여름은, 꼭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유미에게서 느껴졌던 그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과거의 내게서도 느껴지고 있었다. 무언가를 위해.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 분명 기억하기론, 결승까지 올라갔던 것 같은데. 귓가에 맴도는 응원 소리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 “…….” 익숙한 시선과 음성. 따뜻한 목소리와 시선이 흐릿한 기억에 뒤섞여 사라져간다. 그 목소리가 나의 귓가를 맴돌았지만, 라디오를 막 켰을 때 흘러나오는 항상 듣던 채널의 주파수인 것처럼 익숙한 목소리라는 느낌만이 애매하게 들 뿐이었다. 소녀와 나는 그로부터 몇 분 정도를 더 말없이 난간대에 기대어 시간을 보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나로부터 뻗어가던 직선처럼 이어졌지만, 먼저 난간대에서 손을 뗀 건 소녀 쪽이었다. 소녀가 난간대에서 손을 떼자, 서로를 종이컵 무전기처럼 이어주던 실도 그대로 툭 끊어져 버렸다. 난간대에서 손을 떼고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할 무렵, 소녀가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소녀: “저, 기억나는 사람이 있어요.” 나: “정말? 그게 누군데?” 소녀: “말 그대로예요.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그뿐이에요.”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소녀는 나의 손을 슬며시 붙잡았다. 그녀의 한기가 손을 타고 느껴졌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과 어울리는 침묵이 역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의 주변을 맴돌았다. 소녀가 다시 입을 연 건, 열차에서 내려 A구역 터미널 의자에 앉아 집 근처까지 가는 호버크라프트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소녀: “저 있죠, 이름도, 생김새도, 무엇하나 제대로 기억나는 건 없어도 '있었다'라는 것만큼은 또렷이 기억나는 누군가가 있어요.” 나는 소녀의 말을 두 번 정도 곱씹고 나서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나: “즉, 네가 기억하는 건 그 사람의 존재뿐이라는 거네.” 소녀: “정확히는, 온기지만요.” 나: “온기?” 소녀: “네. 따뜻함이라고나 할까. 난간대에서 느껴지던 것과는 정반대의 감각 말이에요.” 나: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 모호한 대답과 함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 “잘 기억나진 않지만, 저는 그 온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것 같아요.” 나: “얼마나?” 소녀: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낄 정도로요.” 나: “엄청 좋아했나 보네.” 소녀: “그렇죠.” 고개를 숙이고는 버릇처럼 다리를 위아래로 까닥이는 소녀. 소녀가 나의 손을 계속 붙잡으려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소녀: “앗.” 다리를 까닥이다 말고 무언가를 발견한 소녀가 짤막한 소리를 내었다. 소녀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서는 A구역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환경 미화 로봇이 소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로봇을 바라보며, 소녀는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녀가 왜 그런 얼굴을 했는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소녀: “으음…….” 소녀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로봇에게 다리를 저으며 이리로 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로봇의 시선에 그녀가 보일 리가 없었다. 로봇의 움직임이 멈춘 건 소녀와 로봇의 거리가 20cm 정도로 좁혀졌을 때쯤이었다. 갑작스레 더듬이가 잘려나간 벌처럼 불규칙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로봇. 소녀와 처음 대면했던 그날 보았던 것과 똑같은 현상이었다. 소녀: “제 주변으로 다가오는 로봇들은 하나같이 저렇게 되어버리더라고요.” 소녀는 마치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구나. 자신의 곁에 로봇이 다가오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걸. 소녀: “…… 꼭 살아있을 때 저를 피하던 길고양이 같아요.” 나: “다른 건 기억 안 난다면서, 길고양이가 너를 피했다는 건 기억하는 거야?” 소녀: “그러게요.” 농담조로 던진 이야기였지만, 소녀는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며 무척이나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소녀: “고양이를 만지려고 할 때마다 정전기가 일었거든요. 지금 로봇들이 저렇게 되는 것도, 제 몸에서 정전기 같은 게 흐르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그 뒤로는 한가한 잡담이 이어졌다. 불규칙한 동선을 그리며 소녀로부터 멀어지던 환경 미화 로봇은 어느새 제기능을 되찾았는지, 바닥에 떨어져 있을 쓰레기를 찾아 나의 시야 밖으로 사라진 뒤였다.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생겼다. 소녀가 기억한다는 그 사람. 가족에 대해서조차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소녀가 기억할 만한 사람이라면, 분명 그녀에겐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너무 내멋대로 넘겨짚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충분히 그럴 법한 추측이었다. 어쩌면 소녀가 이곳을 떠돌게 된 이유도, 그 사람과 관련된 일일 수도 있고. 그저 소녀의 소원을 이루어 줄 힌트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소녀가 한 말을 신경 쓰고 있었다. 자료를 찾아보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소녀가 이야기했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나: “……?” 자료를 찾는 도중 태블릿이 울렸다. 의아한 눈치로 태블릿을 확인하려다 이내 내게 문자를 보낼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는 것을 떠올린다. 예상했던 대로, 메신저함에는 현지의 문자가 언제 봐도 적응하기 힘든 이모티콘과 함께 도착해 있었다. 현지: 선배! 혹시 지금까지 알아낸 거 있어요? ( ゚д゚)?? 평소엔 이런 표정 짓지도 않으면서, 문면으로 드러나는 감정 변화만큼은 여느 여학생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단 말이지. 발신자를 가리고 읽으면 꼭 유미가 썼을 법한 분위기의 문자 메시지인데, 오히려 평소 표정에서 감정 변화가 확연히 드러나는 유미는 문자 메시지에서만큼은 용건만을 전달하는 편이었다. 태블릿을 만지작대며, 나는 현지에게 간략한 답장을 보냈다. ‘조금’이라는 답장을 보내기가 무섭게, 곧장 메신저함에 문자가 도착했다는 알림이 나타났다. 무섭다는 말이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없는 속도였다. 현지: \\\٩(๑`^´๑)۶//// 알아낸 거 있으면 곧장 연락 준다고 했잖아요?!! 아, 맞다. 그랬었지. 화면에는 잔뜩 토라진 듯한 표정의 이모티콘이 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나저나, 현지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또다시 태블릿이 울렸다. 이번엔 문자가 아닌 전화였다. 현지: “뭔가 알아낸 게 있으면 곧장 연락 준다고 했잖아요.”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오는 현지의 목소리는 역시나 평소처럼 차분한 톤이었다. 물론 어딘가 날카로운 음색이 배어있는 것이, 나를 추궁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말이다. 혹시 현지는 방금 보냈던 이모티콘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닐까. 당장 수화기 너머에 있는 현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게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나: “으음, 그게…….” 내가 뭐라 변명을 꺼낼 새도 없이 현지는 말을 이어갔다. 현지: “어쨌거나, 선배. 내일 시간 돼요?” 나: “내일? 시간은 많은데. 그건 갑자기 왜?” 현지: “왜긴요. 만나서 이야기할 게 있으니까 그렇죠.” 나: “알겠어. 언제 만나는 걸로 할까?” 현지: “음…… 내일 한 시에 학교 옥상에서 만나는 걸로 해요.” 나: “어…….” 갑자기 뇌 정지가 왔다. 학교 옥상? 왜 굳이 학교 옥상인 거지? 나: “야, 잠깐만. 꼭 학교 옥상에서 만나야 해?” 현지: “어라, 장소가 신경 쓰이는 거예요?” 수화기 너머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전화로 전해지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한숨을 내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했다. 나: “아냐. 괜찮아. 그럼 내일 오후 한 시에 학교 옥상에서 만나는 걸로.” 현지: “네~ 그럼 그때 봐요, 선배.” 신경이 안 쓰인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전화를 끊으려다 말고, 나는 깜빡한 게 있다며 급히 이야기를 덧붙였다. 나: “아, 그리고 네가 그날 이야기했던 거 있잖아.” 현지: “이야기했던 거요?” 나: “으응, 방학식 날 집에 가는 길에 이야기했던 거. 그 로봇 말인데…….” 현지: “유령 근처에서 로봇들이 오작동하는 게 맞다고 이야기하려는 거죠?” 나: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현지: “다 아는 수가 있죠~” 차분하면서도 절제된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자신이 소리 내어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은 정확히 여기까지라는 느낌의 웃음소리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만난 뒤에’라고 이야기하는 듯하기도 했다. 나: “…… 알겠어. 그럼 내일 봐.” 전화를 끊고 기지개를 켜려는데, 어느새 슬그머니 다가와 있던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이럴 때 보면 소녀가 유령이라는 게 실감 난단 말이지. 소녀: “누군가요?” 나: “전에 봤던 오컬트부 후배. 내일은 나 혼자 나가 봐야 할 것 같아.”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금 유령처럼 스르륵 침대 위로 쓰러져 눈을 깜빡였다. 다음 날,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쪽은 나였다. 약속했던 시간보다는 10분 정도 이른 시각. 나는 버릇처럼 난간대 쪽에 팔을 얹고선 현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여러모로 익숙한 장소다. 이제 곧 옥상에 홀로 있는 나를 현지가 발견하겠지. 몇 달 전에 있었던 오늘과 같은 일이, 지금의 상황과 오버랩되어 또렷이 떠오른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그때의 나는 난간대에 팔을 얹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온몸을 떠맡기고 있었다는 것 정도겠지. 나: “신경 쓰지 마.” 그날, 난간대에 걸터앉아있던 나를 발견한 현지에게 내가 가장 먼저 건넨 한 마디였다. 현지: “저어…… 선배, 지금 혹시…….” 나: “안 떨어져. 그냥 이러고 있는 거야.” 뒤를 돌아보자,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는 옥상 출입구 앞에 얼어붙은 채로 서 있는 현지의 모습이 보였다. 사실이었다. 떨어지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도 아니긴 하다.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저 들려오는 무질서한 목소리를 듣고 있을 뿐. 설령 내가 이 난간대에서 균형을 잃고 건물 아래로 떨어진다 해도. 그건 그것대로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있던 나였다. 현지: “그, 그렇지만 위험하잖아요.” 나: “괜찮아. 이러고 있어야 잘 들리는 것 같아서.” 현지: “뭐가 들린다는 거예요?” 나: “…… 글쎄, 외계인이 부르기라도 하는 건가.” 생각하기 귀찮다는 것을 티 내기라도 하려는 듯, 나는 더없이 가벼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날도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무언의 아우성이 터져버린 날이었다. 과거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무언의 아우성. 2학년으로 올라온 뒤로는 그런 무의식의 외침이 크게 들려오는 날이 확실히 줄긴 했지만, 그래도 가끔 이런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자꾸만 주마등처럼 모호한 과거의 감각들이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감각 하나하나가 나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느껴지는 답답함에 숨이 막혀왔다. 현지는 내 쪽을 향해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내일이 되어 무언의 아우성이 가라앉으면 내가 했던 행동 하나하나를 후회하게 될 테니까. 나: “나, 감정 기복이 좀 심해. 오락가락한다고나 할까. 내일이면 괜찮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 현지: “저…… 그래도 난간에서는 내려오는 게…….” 나: “…….” 난간에서 내려오기 위해 자세를 바꾸려는 순간이었다. 겨울바람인지, 봄바람인지 모를 어중간한 바람이 옥상을 덮쳤다. 나: “어어…….” 몸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는 찰나, 뒤에서 “안 돼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허겁지겁 내 앞까지 달려온 현지가 나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그때. 나의 몸은 균형을 완전히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추락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현지: “아야야…….” 나의 아래에서 현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떨어진 곳이 저 건물 아래가 아닌 현지 바로 위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서는 현지에게 말을 건넸다. 나: “…… 미안. 괜찮아?” 현지도 다리를 털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대로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많이 다치기라도 한 걸까. 몸을 쪼그려 현지의 상태를 확인해보려는데, 뒤늦게 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지: “위, 위험했잖아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현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 “…… 미안. 부딪혔을 때 많이 다쳤어?” 현지: “아, 아녜요. 그냥 살짝 부딪힌 것뿐이니까요. 이건 다리에 힘이 풀려서…….” 고개를 슬쩍 들어 보인 현지가, 헤실헤실 웃었다. 몸에 충격이 가해져서였을까. 들려오던 무의식의 외침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몇 분 정도가 지나고, 현지는 나의 손을 붙잡고선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나: “옥상엔 어쩌다 올라온 거야?” 현지: “그건 제가 묻고 싶은 거라고요.” 나: “…… 그런가.” 특별히 궁금한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질문을 철회하고선, 출입문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현지와 스쳐 지나가며, 나는 그녀에게 부탁의 말을 건넸다. 나: “아, 그리고 방금 있었던 일은 유미한테는 비밀로 해줘. 부탁할게.” 그런 이야기를 남긴 채, 옥상 아래로 내려가려는 셈이었다. 현지: “싫어요.” 또박또박 들려온 현지의 목소리에, 나는 그만 걸음을 멈춰 세워야만 했다. 뒤를 돌아보았다. 현지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돌릴 생각 같은 건 없어 보였다. 현지: “그럼 제 부탁도 들어줘요.” 나: “…… 무슨 부탁?” 현지: “왜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던 건지 이야기해주세요.” 나: “으음…….” 난감한 듯 고개를 돌리려다 말고, 현지의 눈동자를 읽었다. 질문을 철회할 생각 같은 건 일절 없어 보이는 단호한 눈빛이 현지의 얼굴에서 또렷이 읽혔다. 어쩔 수 없나. 발걸음의 방향이 바뀌었다. 나는 다시금 난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현지: “잠깐만요. 뭐 하려는 거예요?” 그런 나를 향해, 현지의 당혹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선 그대로 몸을 난간에 기대었다.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나: “그냥, 이렇게 해야 이야기가 잘 나올 것 같아서.” 철제 난간의 차가운 감촉이 등에 닿는다. 차가운 경계선에 맞닿아 있는 나는, 그 경계선 바깥의 것들과 최대한 가까워진 상태이다.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나는 현지에게 여태껏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과거에서 현재로 오게 된 일부터, 이때까지 과거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보기도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진전이 없다는 것까지. 이야기를 끝내고 현지를 바라보았을 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현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던 현지가 옆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고, 시선을 교차했다. 나는 난간대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켰다. 나: “그럼 됐지? 유미에겐 정말 비밀로 부탁해.” 현지: “안 돼요.” 나: “…….”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려던 나는, 여전히 난간대 앞에 멀뚱히 선 채였다. 나: “이야기 다 해줬는데. 이러면 약속이랑 다르잖아.” 현지: “하나만 부탁한다고는 안 했는걸요?” 그랬었나. 하지만 어느 쪽이었던지 간에, 속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당연하다. 현지: “딱 하나만 더 들어주면 정말 이야기 안 할게요.” 나: “으음…….” 부탁 같은 말이었지만, 사실 내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선택지가 하나뿐인 게임이라. 이런 게임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말이다. 나: “그래. 무슨 부탁인데.” 선심 쓰듯 이야기를 꺼낸 나였지만, 대화를 리드하는 쪽은 현지임에 틀림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직후 현지가 꺼낸 이야기는 내 예상과 완벽히 틀어진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현지: “앞으로는 ‘신경 쓰지 마’라는 말, 하기 없기예요.” 여태껏 맺힌 게 많았다고 이야기하는 듯한 현지의 눈빛이 내게 날아와 꽂혔다. 현지: “매번 제가 말 걸려고 할 때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었잖아요.” 현지: “같은 동아리 부원인데,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 “아, 으응…… 그렇지만…….” 현지: “왜 그랬는지는 이제 알았으니까, 앞으로는 제가 신경 써도 받아 줘야 해요?” 나: “…… 알겠어.” 묘하게 흘러가는 기류 속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누긴 했지만, 정확히 기억나는 내용은 머릿속에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오며 교문을 나설 때쯤이었나.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다며 나를 따라오던 현지가,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현지: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죠?” 나: “응.” 현지: “저, 그 일 도와줄 수 있어요.” 회상이 끝자락에 도달했을 때쯤,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